불과 1년만이다. 지능형 전력망을 뜻하는 ‘스마트그리드(Smart Grid)’란 신조어가 전력산업계에 매우 익숙한 단어로 자리매김한 건. 우리나라는 기후변화주요국포럼(MEF)에서 스마트그리드 선도국가로 지정돼 세계 차원의 스마트그리드 중장기전략(Road map)을 작성하게 됐다. 2009년은 그야말로 스마트그리드 열풍의 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이처럼 스마트그리드 관련 산업이 급격히 각광받게 된 건 역설적이게도 세계 금융시장의 불안과 그로 인한 경기불황이 한몫을 담당했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금융 불안의 진원지인 미국이 경제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새로운 산업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신재생에너지 개발을 역점 추진한 것. 신재생에너지 전원 증가로 인한 계통안정화를 도모할 필요성이 생겼다. 이를 위해선 낡고 오래된 송전망을 교체해야 하며, 더 나아가 에너지절감을 유도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추자는 전략이 나왔다. 스마트그리드 사업의 밑그림은 이렇게 완성됐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지난해 10월27일 연설에서 “녹색에너지로 경제활동을 창출함으로서 큰 전환을 이룰 것”이라며 스마트그리드사업을 위한 설비투자 조성(Funding)제도의 대상을 구체적으로 밝혔다. 오바마 대통령은 “스마트그리드 구축이 그린에너지의 도입이나 전력공급신뢰도향상, 에너지 효율화를 차질 없이 추진해 나가는 원동력이 될 것”이라고도 했다. 총 투자금액은 이미 알려진 대로 약 34억달러에 달한다. 이는 미국이 전력기반설비 분야에 투자해온 액수 가운데 가장 큰 규모다. 이를 목적별로 구분하면, ▲스마트 계량기 31건에 8억1800만달러 ▲수요반응, 시간대별 요금제시 등 수용가 시스템 구축 5건에 3200만달러 ▲배전자동화, 계통상태 감시 등 13건에 2억5400만달러 ▲위상감시장치 등 10건에 1억4800만달러 ▲PC 등 주변기기 제작 2건에 2600만달러 ▲스마트그리드 종합적 투자 39건에 21억5100만달러가 들어간다. 미국 에너지부(DOE)는 지난해 2월 발효된 ‘미국 경기회복 및 재투자법(ARRA-2009)에 따라 스마트그리드 관련 사업투자액의 최대 50%를 조성키로 했다. 지난해 5월, 프로젝트 조성 상한을 1건당 2억달러로 책정, 석 달 뒤인 8월까지 대상과제를 공개 모집했다. 그 결과 미국 내 전력회사 대부분이 투자(Funding) 의사를 밝혀왔다. 이에 따라 결정된 사업과제는 민·관 합계 총 100건에 달한다. 민간부분을 포함한 총 투자금액은 80억 달러 이상이다. 알래스카를 제외한 49개주에 펀딩이 결정됐다. 이에 따라 센터포인트(휴스턴 소재)란 회사는 정부자금 2억달러를 포함해 총 6억3900만달러를 들여 수용가 220만호에 스마트미터를 구축하고, 공급신뢰도 향상을 위한 자동개폐기를 도입키로 했다. 볼티모어 가스·전력회사는 정부자금 2억달러 등 총 4억5100만달러로 일반수용가 110만호에 스마트미터를 도입, 시간대별 요금책정에 나서기로 했다. 이 회사는 또 공급신뢰도 제고와 혼잡해소를 위한 부하제어프로그램도 확대할 예정이다. 덴버에 있는 하니웰에서는 총 2300만달러를 들여 전력수요가 급증하는 시간대에 부하를 자동으로 조절할 수 있는 장치를 업무용·산업용 수용가 700호에 깔기로 했다. 컨솔리데이트드에디슨(뉴욕 소재)은 신재생에너지 도입확대와 에너지절감에 유익한 전력계통기술을 도입하는 한편 자동화, 감시, 양방향 통신 등 배전설비 기능향상을 위해 총 2억7200만달러를 투자키로 했다. 서부전력협조협의회(WECC)는 총 1억800만달러로 실시간계통감시를 위한 위상감시장치와 통신설비를 구축한다. 월풀(벤터하버 소재)은 총 3900만달러로 스마트그리드 관련장치 제작을 지원하고 나선다. 또 수용가의 에너지소비를 일정화한 장치와 피크수요 감축설비 제작도 돕기로 했다. 듀크에너지(샤롯 소재)는 수용가 140만호에 스마트계량기와 양방향통신장치, 배전자동화설비를 도입하기 위해 총 8억5200만달러를 투자한다. 이 회사는 시간대별 요금메뉴를 제공하는 한편 플러그 인 전기자동차 도입도 지원키로 했다.
DOE는 스마트그리드 분야 투자로 고용을 촉진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 밝혔다. 총 47억달러로 추산되는 민간투자로 스마트 계량기분야의 제조업, 기술자, 전기공사기사, 보안전문가, 전력사업 애널리스트 등의 수요가 크게 늘어날 것이란 설명이다. DOE는 2030년까지 미국내 에너지소비량이 4% 줄어들 것이란 관측도 내놨다. 금액으로 따지면 200억달러에 이르는 막대한 규모다. 공급신뢰도도 크게 향상될 전망이다. 연간 1인당 500달러, 미국 전체로 보면 1500억달러에 이르는 정전손실피해액을 줄일 수 있다는 계산이다. 미국 전역에 850곳이 넘는 위상감시장치(PMU)를 설치, 대규모 정전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20만 곳에 감시기능을 탑재한 스마트 변압기를 설치, 정전건수 및 시간을 줄일 수도 있다. 미국 전체의 5%에 달하는 700개 변전소를 자동화함으로써 악천후로 인한 정전복구시간을 단축할 수도 있다. 4000만 세대 이상에 스마트 계량기를 설치, 에너지 효율성을 높일 수도 있다고 DOE는 내다봤다. 100만세대 가정에는 소비전력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는 디스플레이 패널도 설치된다. 또 17만세대에는 공조기 조작기능 등을 갖춘 실내온도 조절기가 장착된다. 17만5000세대에는 부하조절장치가 달린다. 이밖에 식기세척기, 세탁기, 건조기 등 가전기기를 인공지능화하는 방안도 추진된다. DOE는 스마트그리드 도입으로 2020년까지 전체 발전량의 20% 이상을 신재생에너지로 도입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내놨다. 140만kW 이상의 최대전력 감축도 이끌어낼 수 있다고도 봤다. 발전소 건설을 그만큼 늦출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 정부는 프로젝트 현장에 담당자를 파견해 신규고용 등의 경제효과, 신뢰도 향상 등에 대한 의견을 들을 예정이다.
실증프로젝트 공모와 DOE의 선정 결과는 스마트그리드와 관련한 또 하나의 투자파급효과를 가져오고 있다. 반면 추진대상에서 제외된 전력회사는 여러 면에서 압박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기업성장과 쇠퇴의 분기점에 스마트그리드 사업이 놓여있는 셈이다. 미국의 이 같은 계획에 가장 먼저 호응하고 나선 건 이웃나라 일본이다. 일본은 이미 검증된 기술력을 바탕으로 미국 스마트그리드 실증사업에 일부 참여하고 나섰다. 뉴멕시코주에서 주정부, 현지 전력회사와 손잡고 올해부터 2014년까지 5년짜리 실증사업에 일본 NEDO가 참여하고 있는 것. 이처럼 일본은 미국내 스마트그리드 사업에 진출을 표명했고, 실증시험 결과를 바탕으로 스마트 관련기기 세계표준화를 위한 국가적인 움직임에 돌입한 상태다. 김영호 에너지기술평가원 책임연구원은 “우리나라도 스마트그리드 로드맵 작성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며 “관련기술개발과 해외 업체와의 협력으로 국내표준이 세계에서 통용될 수 있도록 민·관이 함께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